나만의 자유 직장의 신과 비정규직... 2013/04/09 00:14 by 어드벤쳐동혁

요즘 직장의 신 이라는 드라마를 참 재미있게 본다.

사실 드라마 자체 스토리는 굉장히 유쾌하고 위트있게 풀어나가긴 하지만 실제로는 파마머리든 미쓰김이든 등장인물들 모두 저마다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난 직장의 신 보면서 재미도 재미지만 서글픔이 더 묻어나온다...

그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2012년 통계에 의하면 총 노동자의 47.5%가 비정규직이라고 한다.

비정규직 사원 계약직 사원 모두가 회사일을 하는 것이지만 계약직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계약직 2년 정도 하고 정규직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재계약이 되지 않아 다시 비정규직으로 전락되는게 사실이다.

사회 제도와 법 시스템이 있는 자들 위주로 설계되었고 그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또한 비정규직이다.

계약이란 것 자체도 존재하지도 않고, 고정적인 월급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알량한 일 몇 개 받아 살아나가기 위해 회사 그리고 정규직 사람들에게 아쉬운 눈길을 보내야 할 처지이다.

직장의 신을 보면서 느끼는 것도... 알게 모르게 희열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도 그 뿐...

현실은 여전히 잔인하다.

난 지금도 잔인한 4월을 보내고 있다.


함께 난 나눠보고싶은 글이 있어서 올려본다.

관심 있으신 분들 아래 링크글을 읽어봐주시면 고맙겠다.



http://blog.naver.com/tckorea1/150130452523 



이어지는 내용

갠지즈강의 일출 2012/02/08 15:11 by 어드벤쳐동혁

2012/2/4 한국에서도 못본 일출

자이푸르의 과일장수 2012/02/08 15:10 by 어드벤쳐동혁

여긴 kg당 얼마씩 무게로 팔고 있다 인도는 뭐든지 무조건 흥정해야함 그러나 장사꾼에게 붙잡히면 내손엔 필요치않던물건미저 들려있다 대단한 상술이야

그라츠-자그레브 2011/12/19 00:45 by 어드벤쳐동혁

드디어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된다.
오늘은 비엔나로부터 2시간 남짓 떨어진 도시 그라츠를 거쳐 발칸반도의 첫 여정지인 자그레브로 이동을 하게 된다.
우선 그라츠로 이동하여 1-2시간 정도 관광을 하고 점심 식사 후 자그레브까지 버스로 달려가는 여정이다. 일과상으로는 반나절투어 반나절 이동이지만, 사실 이동 시간은 총 5시간짜리다.

비즈니스 호텔 답게 래디슨 블루 호텔 조식당엔 사업차 투숙한 투숙객들이 많이 있었다. 빵,샐러드,과일 등의 간소한 식단이었지만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알차게 느껴진다.
역시 고객들 또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설레임으로 인해서 깊은 잠을 청하진 못한거 같다. 벌써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패키지 여행의 특성상 그저 짜여진 일정대로 버스에 몸을 싣고, 시간되면 허기를 채우고, 일과가 끝나는대로 자는 비교적 수동적이고 두뇌 노동이 필요치 않은지라 오히려 고객들은 편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내 역할을 잘해낼 수 있을지 매번 반문해본다.

조식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우리의 칼만(아 어제 만난 우리 기사 아저씨다.앞으로 잘 부탁해요)과도 모두가 인사를 했다. 독일어는 익숙치 않은지라 쉽게 입밖에 나오진 않지만 그래도 칼만이 영어를 약간 할 줄 아니 믿고 의지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총 8명이다. 물론 적은 인원이지만 스스로 발칸을 가마하고 회사에 지원했던 바다. 이를 위해 오동석('나는 유럽에서 광을 판다'의 저자)선배를 찾아 필요한 걸 물어보고 자문을 구했고, 지금은 은퇴한 발칸 전문가이드였던 박종규 투어리더를 일요예배까지 찾아가서 강의를 청했다. 그러므로 적은 인원은 내가 조금더 집중할 수 있고, 내가 앞으로 이야기하고 보여줄 일련의 투어 프로그램을 다시 갈무리하기에 무엇보다 좋은 조건이다. 사실 인원이 많으면 그만큼 신경 써야할 것도 많고, 고객들의 현재 상태와 반응파악이 힘들다. 

처음 출발은 일반적인 오스트리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Thru 가이드의 진검승부인 아는 지식을 최대한 동원하여 고객에게 전달하는 시간이다.(초반 언어구사기술이라든가 지식의 양에 따라 고객이 가이드를 평가하는 데이터가 된다)
오스트리아 이야기에서 그라츠로 다가가면서 그라츠의 뮤린젤과 쿤스트하우스(에일리언) 그리고 아놀드 슈왈츠네거 등 그라츠에 관련된 멘트로 끝맺음을 하니 어느 덧 그라츠에 당도해 간다.

이미 시내지도를 닳을 정도로 보고 그렸던지라 자신이 있었지만, 막상 그라츠에 도착하니 헷갈리는 건 마찬가지다.
어쨋든 8명의 고객을 인도해 관광지를 조망하고 자유시간을 드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려와 점심식사를 할 식당에 가서 식사 예상 시간을 통보했고, 메뉴와 우리가 앉을 자리를 확인했다. 아울러 바우처의 유효성 여부 또한 확인했다.(한국 여행업은 비교적 해외업소에 Credit(신용)이 부족한 편이다. 지나치게 중소 여행사들의 난립으로 경쟁하다보니 영세하기도 하거니와 가끔 지불해야할 금액을 지불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식사 후 손님을 먼저 내보낸 후 내빼는 저가여행사 인솔자도 있었다고 한다.)

식사는 크랍센켈러라고 하는 커다란 가재간판의 식당에서 오스트리아 요리인 슈니젤을 맛보았다. 슈니젤은 어린 송아지 고기를 얇게 두드려펴서 빵가루를 묻혀 튀긴 요리로 레몬즙을 뿌려 먹는 유럽식 돈까스이다. 사실 이 슈니젤 요리법이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서 포크커틀릿이 되었고, 다시 서양에서 일본으로 넘어가 돈까스가 된 셈이니. 슈니쩰은 돈까스의 할아버지 뻘 되는 족보있는 요리이다. 

다행히 그라츠에서 날씨는 환상적이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시청 광장에 쏟아지고 있었고, 고풍스런 건물과 어울려 많은 패셔니스타들과 여행책자를 들고 이리저리 헤매는 관광객들로 인해 완벽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준비한 것보다 훨씬 시간이 모자라 오히려 이야기하지 못한 것은 차를 타고 자그레브로 이동하면서 하기로 하고, 고객들과 다시 버스로 이동하였다.
-유럽의 많은 시가지는 대형 버스가 중심가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주차가 불가능하고 오래된 도로,건물로 인해 진입이 용이하지 않고 혼잡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다시 버스는 열심히 달려 우리를 자그레브로 날라다 줄 것이다. 칼만은 우리 사이의 언어라는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시간을 쪼개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길 원했다. 그래서 이동 중 멘트를 하는 시간 외에는 마치 수다를 떠는 것처럼 칼만과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다보니 생각과 사고가 통하는 것과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둑어둑 해가 떨어질 무렵 어느덧 자그레브에 도착했다.
확정서 상 자그레브 시내 관광 가이드를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해서 연락을 했다. 
오래된 노신사를 중앙역에서 만났고, 그를 따라 드디어 자그레브 투어를 했다.
자그레브 투어는 도보로 약 1시간 정도 성당으로부터 시작해서 시작과 돌의 문 성 마르코 성당을 거쳐 반 옐라치차 광장에서 끝나는 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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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11214 2011/12/14 17:10 by 어드벤쳐동혁

2010 10월
그날 처음 떠났던 자그레브의 밤거리는 무섭기도 하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비교적 근사한 저녁식사 후 산책을 나갔으나 겁많고 소심한 나는 그저 광장 주변만 멤돌 뿐이었다. 
전차만 다닐 수 있는 옐라치차 광장엔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때이른 두터운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과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거나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엔 의젓한 개 한마리를 데리고 나와 아코디언을 부는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연주자가 있었다.
그의 표정은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베어 있었으며 그 주변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는 기색따윈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나를 빼고 말이다.

나의 발칸반도 여행은 비엔나에서 시작되었다.
비엔나 공항에 내려 예약된 버스기사를 만나기 위해 공항 건너편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진땀이 났다.
그도 그럴것이 나 또한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초행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러 곳을 여행했다고는 하지만 (오스트리아도 여행경험이 있다.) 이젠 거의 대부분의 곳이 비슷하거나 헷갈리거나 틀린 기억이 많다. 그래서 따로 꼼꼼히 기록해두지 않으면 이렇게 긴장하기 마련이다.-난 그리 꼼꼼하게 기록하는 성격은 아니다. 관심사에만 집착하지 나머지 것은 도외시 하는 경향이 있거나 미뤄두기 때문이다.

버스기사를 만났지만, 헝가리인이었다.
처음엔 사실 큰 걱정하지 않았으나 다시 진땀 빼는 며칠이 시작되었다. 헝가리인 기사아저씨는 약간의 영어만 가능할 뿐 그 외에 나와 소통할 땐 바디 랭귀지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소통이 잘 되는 편이기도 해서 다행이었지만, 우리는 손님들 앞에선 이야기가 잘통하는 연기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통밥이라는게 있지 않은가? 기사 아저씨 통밥과 내 통밥을 합치면 경력이 약 50년은 될 거다. 나중엔 서로 눈빛만 교환해도 원하는 걸 알 정도였으니 그래도 행운이 따라 준 것 같다.

일정이랄 것도 없지만 처음엔 비엔나의 한식당을 찾았다. 다행히 헝가리인 기사가 비엔나에 자주 오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찾았다. 식당에 들어서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식당에 찾아온 오스트리아 현지 여행사 직원을 만났다. 각종 바우처와 현지 지출해야 할 일부 비용들을 준다(?) 이건 현지에서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뜻한다. 그럼 이건 완전 Thru가이드네...
나름 준비를 많이 해오긴 했지만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아 로마 시대때부터 현대 보스니아 내전까지 방대한 역사와 이야기를 내가 해설할 자격과 지식이나 있었던가... 산 넘어 산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게 영어가 가능한 현지인이 총 9일 일정 중 반나절씩 3번 나온단다...
그러나 결국 나의 평균 하루 수면 시간은 3시간이었고 잠들기 전까지 나는 내가 가져온 모든 도서류와 자료를 바탕으로 다음날 해야할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외워야만 했다. 
더 자격있는 사람이 있으면야 좋지만 아직까지 발칸 반도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내에서도 손가락에 꼽을거다. 그마저도 야박하고 터무니없는 대우 때문에 나서는 사람도 없다.(우리나라 여행사 종사하는 가이드 및 인솔자는 월급이 없고, 하루 평균 $30의 일당을 받는다. 그마저도 한달에 일할 수 있는 날은 보름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쉰부른 궁전 근처에 래디슨 호텔이 우리의 첫 숙소였다. 이번 여정에서 비엔나는 그저 들어가고 나가는 게이트 웨이 역할일 뿐이다.
비엔나도 낭만있고 예쁜 도시이긴 하지만 시간 상 오스트리아 관광은 그라츠 반나절 뿐이다.
래디슨 호텔은 유럽의 여느 다른 도시와 다른 것 없이 좁은 객실과 오래된 고건축물을 개조한 형태의 전통있는 건물에 있는 호텔이다. 깔끔했고, 쌀쌀한 날씨의 추위를 잊게 해줄 포근함이 있었다. 그래도 무선인터넷 등 될 건 다 되었다.
오늘 하루만해도 엄청 긴장을 한 탓에 피곤하기만 하고 잠이 잘 안온다. 바에 가서 마티니 한 잔의 사치를 부리고 잠이 들었다.
자 내일은 그라츠-자그레브로 향해 가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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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면 이미 싸이코패스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1/11/25 20:04 by 어드벤쳐동혁

아스퍼거 증후군
사회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고, 행동이나 관심 분야, 활동 분야가 한정되어 있으며 같은 양상을 반복하는 상동적인 증세를 보이는 질환이다. 이런 특성들로 인해 사회적으로, 직업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두드러지는 언어 발달 지연이 나타나지 않는 전반적 발달 장애의 일종이다. 아스퍼거 장애는 자폐증과는 달리 어린 시절에 언어 발달 지연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정상 언어 발달을 보여도 현학적이거나 우회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의사소통의 실용성 면에서 어려움을 보인다.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스들은 감정을 관여하는 전두엽이 일반인들처럼 활성화되지 않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는 데 매우 미숙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해 이기적이며, 대단히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을 한다.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이 아니며(미국의 경우, 사이코패스의 인구가 500만 명 정도 되는데 그중 살인자는 몇만 명뿐이다.) 폭행이나 상습 절도, 강도같은 범죄를 우발적으로, 연속적으로 일으켜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경우가 많아지며, 거짓말에 매우 능하고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도 눈 하나 꼼짝하지 않으며 곧바로 다른 거짓말을 생각해내기도 한다. 뻔뻔하게 어떤 말이든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 때문에, 매우 무식한 사람이라도(사이코패스는 대체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충동적인 성격이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을 막는다.) 아주 박식하고 매력적이며 유능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사이코패스는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된다. 그렇기때문에 정치계나 업계의 상위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계산적인 행동과 표정과 말투로 사회에서 능숙히 섞여지내고 환경에 따라 발현되는 정도가 달라 범죄를 저질렀을때만 사이코패스를 일반인과 구분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보통 사이코패스를 '반사회성 인격장애' 라 부르기도 한다.

어머니가 며칠 대전에 내려가셨다. 지난 7월에 어머니의 동생인 작은 외삼촌이 심근경색으로 운명을 달리하셨고, 이번엔 작은 이모가 암말기 판정을 받았다. 암 판정을 받은 이모가 마음에 걸리셨는지 며칠 우울해하시기도 하고 아무일도 못하시겠다고 부랴부랴 내려가셨다.

지난 번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슬퍼하셨다. 물론 나도 빈소에 함께 있었으나 그저 묵묵히 부조금 받는 일을 하는 등 비교적 이성적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가족은 슬퍼하고 또 슬퍼하는 것이 3일간의 일과였다. 너무 이성적인 내가 미안해 할 정도로...
1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난 어쩌면 누군가의 슬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도 하거니와 실감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한 결과인가보다. 어쩌면 너무 냉소적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사회적 현상인 것처럼 대부분의 내 또래 친구들은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보다 사무적으로 방문하고 조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정상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사람에겐 희노애락 외에도 다양한 감정이 있는걸로 안다. 특히 한국어적 표현엔 인간의 감정을 다른 언어보다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긴 하지만 실제 사람의 감정은 더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과연 인간의 감정은 무엇인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선천적이 아닌 후천적이고 발달적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각종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실제로 불특정 또는 특정다수를 나무망치 또는 모니터의 터치 한 번으로 죽일 수도 있는 정책을 너무나도 쉽게 자기들끼리 모여서 쉽게 처리한다. 그리고 겉으로는 무척이나 슬퍼하고 공감하는 듯한 플레이를 한다. 그걸 진심이라고 받아들이는 이도 자신이 감정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봤을 때 그들에게 감정은 곧 연기이다!

감정이란 통치받는 자에게만 생겨나는 산물인 것일까? 세상의 모든 것은 아마도 피라미드 형태를 취하고 있나보다. 계층, 소득차이, 경력의 차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어린이와 어른, 학생과 성인 등 등...따지고 보면 그 꼭지점에 있는 자와 그 아래 넓게 분포하는 이들의 차이는 휴머니즘의 인식 차이같다.

사회지도층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는 하지만 항상 자신들을 대로 인식하는 자의적인 이론에 입각해서 말한다.
반면 민초들은 어떻게 사람이? 그리고 피해 대상을 "그게 네 가족, 네 형제라고 생각해봐라" 하는 등의 인도주의적인 것이 한정짓는 논리를 편다.

그 논리를 펴는 자는 항상 공권력 앞에 무릎 꿇리고 물대포를 맞고, 언론에 의해 폭도로 지목되어지거나 우리나라 식으로는 빨갱이 또는 주적 북한으로 둔갑한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런것에 무뎌졌고, 어제 온라인 본 댓글들은 놀라우리만큼 사이코패스와 닮아 있었다.
"물대포 맞고 동상이나 걸려라! xx들아!" , "이런 날 물대포 맞고 정신차려봐야지 빨갱이들" 등 등의 댓글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글을 쓴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댓글이 양론화 되어 있다고 하면 2:3이었다. 내가 봤을 때 과반수가 이미 싸이코패스와 닮아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우린 이미 우리가 만든 지옥에 가두어진 것은 아닐까? 누구의 슬픔도 기쁨도 공감하지 못할 만큼 아스퍼거 증후군과 싸이코패스 기질을 후천적으로 그리고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었고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된다.






부여와 불가리아 2011/11/17 11:25 by 어드벤쳐동혁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비잔틴시대의 기록화.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남자들의 바다에 대한 환상 2011/11/16 18:53 by 어드벤쳐동혁

고전 자료임 순풍산부인과 ㅋ

미분류 Hawkins Uma super fit 2011/10/27 20:19 by 어드벤쳐동혁

안에 네오프렌 소재로 덧신이 있고 로고가 새겨진 건 깔창. 안쪽에 끈 구멍이 쇠로 되어 있어서 끈 손상 감소
오늘 착용하고 경복궁까지 다녀왔는데 발이 아주 편했음 쿠션도 좋고 착 감기는게 느낌이 좋음
다만 목있는 양말을 신어야 할 듯

나만의 자유 잡스의 졸업연설문 中... 2011/10/07 23:03 by 어드벤쳐동혁

Stanford Report
Steve jobs / apple ceo
2005.6.12. 스텐퍼드대학 졸업식에서


저는 오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 중 하나인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결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처럼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온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 삶에 있었던 3가지 이야기를 말하려고 합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3가지만요.

첫번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리드 컬리지를 다닌 지 6개월 만에 자퇴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대학을 그만두기 전, 18개월 남짓 청강생으로 학교 주위에
머물렀습니다. 제가 왜 자퇴를 했을까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저의 생모는 젊고, 미혼의 대학원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저를 입양시키기로 결정햇습니다. 그녀는 제가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 입양되기를 강력하게 원했었고, 그래서 저는
태어나면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도록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국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저의 양부모에게 한밤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예정에 없던 사내 아이가 태어났는 데, 그래도 입양하기를 원하십니까?" 저의 양부모는 " 물론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저의 생모는 양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몇 개월이 지나서 양부모가 저를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겨우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17년이 지난 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순진하게도 거의 스탠퍼드만큼 비싼 대학을 선택했습니다.그리고 노동계층이었던 부모님이 모아두었던 돈 모두가 저의 학비로 쓰였습니다. 6개월 후 저는 대학에서 그만한 가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대학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도울 수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학에서 제 부모님이 평생동안 모은 돈 전부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퇴를 결심했고, 모두 잘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때는 무척 두려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뒤돌아보면 그것은 내가 내린 최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순간 저는 흥미없었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을 그만둘 수 있었고, 관심을 갖고 있었던 과목들을 청강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다 로맨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기숙사도 얻지 못했고, 그래서 친구집의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먹을 것을 사기 위해 5센트씩 하는 콜라병을 모아 환불
받기도 했으며,매주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밤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하레 크리슈나 사원까지 7마일을 걸어가곤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호기심과 직관을 믿고 행동한 많은 일들이 결국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이 소중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리드대학은 아마도 최고의 캘리그래피 강의를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캠퍼스 곳곳의 포스터마다, 모든 서랍의 라벨마다 글씨가 아릅답게 씌어 있었습니다. 제가 자퇴를 한 상황이라 일반 과정을 수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관심이 가는 캘리그래피 강좌를 듣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serif와 san serif의 글꼴을, 다른 글자의 조합 사이에서 공간의 다양한 변화에 관해, 또한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더 위대하게 만드는지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으로 오묘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이러한 어떤 것도 제 삶에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우리가 처음으로 맥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할 때, 그것들은 모두 나에게 커다란 도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맥에 그것들 모두를 반영해 디자인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타이포그래피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입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과정을 듣지 않았더라면, 맥은 결코 다양한 글꼴들과 균형 잡힌 글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윈도가 맥을 따라했기 때문에, 윈도기반 개인용 컴퓨터는 그것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만일 제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저는 결코 이러한 캘리그래피 강좌를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처럼 아름다운 타이포그래피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점들을 앞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뒤를 돌아보니 모든것이 명료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앞을 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단지 뒤를 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점들이 어떻게든 당신의 미래에 연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믿고 있습니다.
당신의 배짱, 당신의 운명, 당신의 인생, 혹은 카르마 또는 그 무엇인가...
저의 이러한 접근방법은 결코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그것은 제 인생에서 모든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저는 제가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워즈와 저는 20세때 저의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동안에 4,000명이 넘는 직원을 가진 20억 달러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최고의 작품 맥킨토시를 1년 더 빨리 출시했습니다. 저는 그때 막 30세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그리고 나서 저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제가 시작한 회사에서 어떻게 해고될 수 있냐구요? 글쎄요, 애플이 성장함에 따라서 우리는 저와 함께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는
매우 유능하다고 생각한 누군가를 고용하게 되었고, 처음 1년 정도 일은 잘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관한 비전은 어긋나기 시작했고,결국 우리 둘 사이도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회사의 이사회는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30세에 회사를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식적으로. 저의 모든 젊음의 중심이었던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파괴적이었습니다.
몇 개월 동안 저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선배 기업인들을 실망 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제게 넘어온 바통을 떨어뜨렸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데이빗패커드와 밥노이스를 만나 이렇게 일을 만든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도 했습니다. 저는 매우 공적으로 실패를 했고, 심지어 실리콘밸리에서 달아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습니다.
애플에서의 일련의 사건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는 거부당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제가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저에게 일어났던 일 가운데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공에 대한 중압감은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가벼움으로 대체되었고, 이전보다는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조금 덜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제게 제 인생에서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다음 5년 동안, 저는 넥스트와 픽사라 불리는 또 다른 회사를 시작했고, 제 부인이 된 멋진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어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애플이 넥스트사를 인수하는 주목할 만한 일련의 사건 속에서, 저는 다시 애플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이 현재 누리고 있는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저는 멋진 가정을 꾸렸습니다.
제가 만약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독하게 쓴 약이었지만, 화자에게는 그런 약이 필요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때때로 삶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릴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저는 저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것이 제가 한 일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일 앞에서도 진실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이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믿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인생의 관계처럼, 세월이 흘러갈 수록 점점 좋아지게 됩니다.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시길 바랍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17살 때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간다면, 당신은 당신이 분명히 올바르게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저에게는 감동적이었고, 그 이후로 33년을 살아오는 동안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그리고 계속해서 "아니오"라고 대답하게 된다면, 저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주치는 인생의 순간마다, 내가 곧 죽게 될거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삶에서 중요한 선택을 하도록 돕는 가장 소중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 - 외부의 모든 기대들, 모든 자신감, 수치심과 실패의 두려움-,
이러한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사라져 버리고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게 됩니다.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잃게 된다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하게 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벌거벗겨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1년 전쯤,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검사를 받았고, 췌장에 종양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심지어 췌장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저에게 이것은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는 것을 말해줬고,
저는 기껏해야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주치의는 집에 돌아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말했고,
그것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앞으로 10년동안 아이들에게 말하려 했던 모든 것을 단 몇 달 안에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상을 정리하고 마무리해서 가족이 가능한 쉽게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진단을 받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저는 생체조직을 떼어내는 검사를 받았습니다.
목으로 들어가서 위를 통해서 장으로 들어가는 내시경 검사를 했습니다. 췌장의 종양으로부터 조직세포 몇 개를 떼어냈습니다. 저는 침착했습니다. 함께 있던 아내는 현매경으로 세포를 검사하던 의사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고 말해줬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아주 드문 형태의 췌장암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건강합니다. 이것이 제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갔던 것이었고, 또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 일을 경험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어떤 경우에는 유용하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 있을 때보다 좀더 확실하게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천국을 가길 원하는 사람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최종 목적지입니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단 하나의,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대리인입니다.
그것은 오래된 것들을 치움으로써 새로운 것들을 위해 길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지금 새로운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어느날 여러분은 점차 오래된 것이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너무 드라마틱하게 들렸다면 죄송스럽지만,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낭비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독단에 빠지지 마십시오. 자신 내면의 소리를 방해하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진정 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외의 모든것들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The Whole Earth Catalog라고 불리던 재미있는 출판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세대에게는 바이블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멀지 않은 멘로 파크의 스튜어트 브랜드 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그는 거기에 시적인 감수성으로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때는 개인용 컴퓨터와 전자출판이 나오기 이전인 1960년대 후반이어서,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책이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구글이 사용되기 35년 전의, 종이로 만든 구글이었습니다.
그것은 간결한 도구와 위대한 개념으로 만든 이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The Whole Earth Catalog를 몇 차례 발행했고, 결국에는 최종판을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1970년대 중반이었고, 저는 여러분의 나이였습니다. 그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의 사진이 실려 있어서, 만약 여러분이 모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히치하이킹 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진 아래에는 "Stay Hungry. Stay Foolish. " 라는 말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고별 메시지였습니다. 배고픈 채로, 바보같은 채로...
그리고 저는 항상 제 스스로가 그렇게 되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졸업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여러분이 그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배고픈 채로, 바보 같은 채로 살아가길...
대단히 감사합니다.


영어 원문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six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s,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dollars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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